공중작전·훈련

공수부대 최악의 보직... 글라이더 파일럿

有美조아 2015. 6. 23. 20:15

 

 

 

 

2차 대전 당시 각국에서 맹활약을 펼친 부대로 공수부대가 있다. 그렇다면 포위되는 것이 주 임무라는 이 위험천만한 부대의 보직들 중에서도 가장 빡센 보직은 무엇일까?(뭐, 공수부대원 스스로도 얘기하듯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미친 짓이 어디 있겠나만은..) 봉달이의 짧은 소견으로는 아무래도 글라이더 조종사가 아닐까 한다.

 

 

 

 

 

 

2차 대전 당시 각국의 공수부대는 낙하산으로 낙하하는 패러슈트(parachute) 부대와 글라이더로 투입되는 글라이더(Glider)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이 둘은 또 지네끼리 서로를 얕잡아보며 투닥거리기도 했다..근데..패러슈트 강하병이 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긴 하다..위험수당이 월 25달러 더 많은 50달러였다..글라이더병 위험수당은 월 25달러..)

 

 

미군은 1923년에는 육군이, 1930년에는 해군이 각각 글라이더 부대에 관심을 가지며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그저 관심만 가진 채 방치되어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유일한 글라이더 운용 경험자들은 극소수의 스포츠 및 레저 활동을 하기 위해 이를 즐기던 사람들이었고 군용 글라이더의 설계 및 운용 기술은 전무에 가까웠다.

 

 
그러던 1940년 5월 11일,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큰소리를 쳐대던 벨기에의 에방에말(Ében-Émael) 요새의 머리위로 독일 공수부대 팔슈름야거(Fallschirmjager)의 글라이더가 날아들어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단박에 요새가 탈탈 털리자 전 세계의 군 수뇌부는 놀라 자빠졌고 1941년 2월 25일,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Henry Arnold) 장군은 당장 미 육군성을 졸라 허가를 득한 뒤, 적절한 글라이더 부대원의 교육과 군용 글라이더의 개발 및 조달을 명령했다.

 

 

 

 

 

전세계가 놀라 자빠진 팔슈름야거의 에방에말 요새 점령 작전..

 

 

 

그러나, 글라이더 조종사를 확보하기 위한 아놀드 장군의 초기 요청이 참전이 결정된 1942년, 6,000명의 글라이더 조종사 확보로 상향된 이후, 정책을 과감히 수정할 필요가 있었고 지원 인력의 부족을 막기 위해, 미 육군은 전혀 비행 경험이 없이 입대한 병사들도 비행학교를 수료하는 즉시 기술 하사관으로 임용해 준다는 당근 정책을 세웠다.

 

 

비행 경험이 있는 인원들은 조종사 기초 훈련 과정에서 월반할 수도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기술 하사관이 아니라 일반 전투기나 폭격기 조종사와 같이 비행학교 수료와 동시에 전원 장교로 임관되었다.

 

 

 

 

 

비행 학교의 훈련용 글라이더 TG-8과 교육 프로그램

 

 

 

또한 착륙 이후 보병으로 투입되도록 훈련받는 독일군이나 영국군과는 달리, 오랜 기간을 들여 양성한 고급 기술을 가진 인원들을 전투로 소모할 수 없다는 정책 하에 전투 편성에서 제외하고 오로지 조종만 하도록 하였으나 실제 전장에서는 사실 별 소용이 없었다.(어느 정도 전투를 거쳐야 아군과 연결되는 공수 부대 특성상 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는..그럼, 아군은 죽어라 싸우는 중인데 나는 파일럿이요 이럼서 놀까나? -_-;;)

 

 

기초 글라이더 비행 훈련을 이수하면 훈련생들은 텍사스 주 쉐퍼드 필드(Sheppard Field)에서 글라이더 역학 과정을 수료하였고 거기에 더해 대부분의 글라이더 조종사들은 보병 장교 훈련도 따로 받아야 했다.

 

 

 

 

이런 것도 해야 했다..기관총 사격 훈련 중인 글라이더 비행 학교 교육생들..

 

 

 

이들은 훈련 마지막 과정에 와코 항공사(Waco Aircraft Company)가 제작한 CG-4A 글라이더를 2번씩 조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2차 대전 기간 동안 미 공수부대의 주력 글라이더가 CG-4A 글라이더였다.

 

 

25.5m의 날개와 14.5m의 동체를 가진 CG-4A 글라이더는 철제 골조에 캔버스를 입힌 구조로 되어있었고 벌집구조로 된 합판 바닥재는 4,000파운드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으며 이는 두 명의 조종사를 포함, 최대 15명의 병력, 또는 지프 같은 차량과 이를 운영하는 소수의 승무원을 적재할 수 있었고 기수 부분은 지프, 75mm 대전차포, 또는 비슷한 크기의 차량이 출입할 수 있는 1.5×1.8m의 접이식 도어가 달려 있었다.

 

 

그 견인 비행기로 사용되었던 C-47 수송기에 연결했을 때 150mph의 속도로 견인되다가  92m 길이의 1인치 나일론 로프 견인선이 절단되면, 72mph의 속도로 지상으로 글라이딩하며 착륙했다.

 

 

 

 

 

미 육군 공수부대의 주력 글라이더인 WACO CG-4A 글라이더..

 

 

 

하지만 글라이더의 조종과 착륙과정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어서 적의 대공포화와 갑작스런 기상 변화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고 대표적인 케이스로 1943년 8월, 세인트 루이스에서 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글라이더 제작사가 시장과 다른 고위 인사를 초대, 5,000여명의 관람객 앞에서 글라이더 비행을 관람하는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서서히 내려오던 글라이더가 갑자기 2,000피트 상공에서 날개가 떨어져 나가며 관람석 앞에서 추락하는 대형 사고도 있었다.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세인트 루이스에서의 글라이더 추락 사고..

 

 

 

물론 실전에선 훨씬 더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야, 316 TC(Troop Carrier) 그룹 37  TC 중대 소속 맥리(MacRae) 중위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면 노르망디의 독일군은 연합군 글라이더 침공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는데 대공포는 둘째 치고 "롬멜의 아스파라거스(Rommel's asparagus)"라고 불리는 폭발물이 장착된 3m 높이의 철제 기둥 사이를 와이어로 연결한 글라이더 방지용 네트가 거의 모든 개활지에 설치되었다.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글라이더 잡는 거미줄이었다..

 

 

 

맥리(MacRae) 중위는 영불해협을 넘자마자 견인기의 파일럿으로부터 엔진이 꺼져서 글라이더 견인선을 잘라야 한다는 다급한 목소리의 연락을 받았고(이는 핑계에 가까운 소리다..빨리 토낄려는..) 육지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통사정한 뒤에야 에어 포켓(Air pockets)과 40mph의 바람이 만든 난기류와 수없이 작열하는 대공포화 속에 내 팽겨 쳐졌다.

 

 

격렬한 대공포화 속에 뒤에 착석한 병사들 중 일부가 여분의 방탄 재​​킷을 발견하고 그에게 입을 것을 권유했지만 좁디좁은 글라이더 조종석은 방탄 재킷을 착용하고는 좌석에 않을 수조차 없어서 그들은 아무것도 글라이더의 캔버스 천을 뚫고 들어오지 말라고 기도나 할 수 밖에 없었다.

 

 

극도의 긴장이 흐른 후 그는 노르망디에 안전하게 글라이더를 착륙시켰지만 그곳은 예정된 착륙 구역에서 40km나 떨어진 곳이었고 그와 병사들은 아군 부대를 찾아 3일이나 헤멘 후에 합류할 수 있었고 그는 어렵게 다시 영국의 기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맥리(MacRae) 중위는 이후 마켓가든 작전에도 참가하였고 여기서도 그는 견인기가 너무 빨리 견인 와이어를 끊는 바람에 허허벌판인 무인지대에 착륙하였으며 지나가던 네덜란드 민간인에게 자신의 K-레이션(ration)을 주고 바꾼 다 찌그러진 자전거를 타고 겨우겨우 56km 떨어진 벨기에 브뤼셀(Brussels)로 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날으는 관(Flying coffin)”, “견인 타겟(Tow target)”이라는 악명 높은 별명으로 불리던 글라이더는 그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조종사들을 희생시켰다.

 

 

 

 

 

 

대표적인 전투만 살펴 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517대의 글라이더가 투입되어 44명의 글라이더 조종사가 전사하고 두 배 이상의 부상자 발생했으며 남 프랑스 상륙작전인 드라군 작전에서는 407대의 글라이더가 투입, 23명의 조종사가 전사하고 6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마켓가든 작전에는 1,618대의 글라이더가 투입, 40명의 조종사가 전사하였고 37명의 부상자와 65명의 실종자(MIA)가 발생했으며, 라인 도하 작전인 버시티 작전(Operation Varsity)에서는 906대가 투입되어 88명이 전사하고 240명이 부상당했으며 31명이 실종되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글라이더 조종사들은 그 위험성 때문에 전투 손실 및 훈련사고 비율이 전투 병과에서 최상위에 랭크된 것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작열하는 대공포화 속을 느려터진 글라이더를 몰고, 견인 로프를 해제한 후 수초 이내에 글라이더가 착륙할 안전한 장소를 선택하여야 했고, 조종사는 자신을 저지하기위한 장애물로 가득찬 지역을 피해 적진 한가운데에 그의 글라이더를 거의 지면과 충돌하듯이 착륙시켜야 했으며 이후로도 다른 일반적인 항공기 조종사들과는 달리 전투가 일정 부분 아군에 유리하게 전개될 때까지 공수부대 전투원과 같이 전투에 참가해야만 했다.(안전한 착륙도 힘들었지만 착륙하자마자 격추된 다른 파일럿 처지가 된다는 얘기..)

 

 

 

 

 

 

 

다른 조종사와 마찬가지로 글라이더 조종사도 비행학교를 수료하면 날개 뱃지(wings badge)가 수여되었고 그들은 이를 가슴에 부착했다. 이들에게 수여된 윙 뱃지 중앙에는 "G"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당연히 이는 글라이더를 상징했지만 글라이더 조종사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재빨리 이렇게 대답했다, "배짱(guts)의 약자"라고.

 

 

 

 

 

 

한 글라이더 조종사 출신 참전용사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상상해보라. 천쪼가리로 덮인 엔진도 없는 CG-4A 글라이더에 타고 C-47 수송기 100m 뒤에서 나일론 로프에 끌려가는 모습을.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며 덜덜 떨리는데 뒤에선 바짝 쫄아든 병사들의 구토와 기도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얇디얇은 천쪼가리 밖에서 대공포가 터질 때마다 그 진동으로 온몸이 공중으로 들썩였다. 그때 기분은 마치 다이너마이트 막대기를 타고 지옥문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사진출처>

 http://www.ww2gp.org/training.php
 http://untoldvalor.blogspot.com/2007/08/world-war-two-glider-pilots-rare-breed.html

 http://www.pointvista.com/WW2GliderPilots/glider_pilot_training.htm

 http://worldwar2headquarters.com/HTML/normandy/airborneAssault/gliderPilots.html

 http://www.wwiivehicles.com/united-states/aircraft/glider/waco-cg-4a-hadrian-glider.asp

 http://thecompanyclerk.blogspot.com/2010/07/as-many-of-you-know-i-am-reenactor.html
 http://www.anticsonline.co.uk/1853_1_106548049.html

 http://ww2db.com/image.php?image_id=7700
 http://wikimapia.org/429680/Fort-of-Eben-Emael#/photo/2077783

 

 

 

출처    http://blog.daum.net/mybrokenwing/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