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무기·장비

대타에서 주역으로 변신하다. T-62 전차

有美조아 2016. 4. 10. 10:10

 

아프가니스탄군이 운용 중인 T-62S. 현재 구형임에도 상당수의 국가에서 주력 전차로 활약 중이다.

 

 

소련과 미국은 한편이 되어 공적인 나치 독일을 격멸했지만 원래 상이한 이념을 추구하고 있었기에 앞으로 계속 함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상 최대의 전쟁이 끝났음에도 전후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이들의 경쟁은 오히려 더욱 치열해졌다. 그렇게 냉전시대가 개막되면서 보다 강력한 무기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당시 이들은 소총부터 핵무기까지 무조건 상대보다 강력한 것을 보유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지난 전쟁 동안 지상전의 왕자 노릇을 담당한 전차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의 거대한 기갑전을 치르며 상당한 전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소련은 이 분야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그러한 소련의 집념은 1946년부터 T-54의 양산에 들어가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T-54는 이전까지 작전 목적에 맞는 중(重)전차와 중형(中型)전차를 각각 개발하고 운용했던 방식을 과감히 포기하도록 만든 걸작이었다.

이에 놀란 미국이 1949년 부랴부랴 M26을 개량한 M46을 대항마로 내세웠지만 소련은 T-54의 주행 성능과 방어력을 개량한 T-55로 곧바로 대응하면서 우위를 계속 유지하였다. 미국도 심각한 우려를 표했을 만큼, 적어도 겉으로 알려진 T-55의 성능은 당대 최고로 자부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1967년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는 이러한 자신감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다운그레이드형이고 이집트, 시리아군의 훈련 부족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T-55는 예상보다 부족한 부분이 많았고, M48을 비롯한 미국 전차의 성능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미국이 보다 강력한 M60의 개발에 나선다는 정보를 확인한 소련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미국이 보유하고 있거나 개발 중인 전차를 능가하는 신예 전차가 요구되었다. 이처럼 복잡했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탄생한 소련의 전차가 T-62다.

 

 

 

198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소련군 소속 T-62M. 이처럼 주력으로 맹활약했으나 현재 러시아에서는 완전히 퇴역했다.

 

 

중동전쟁에서 쓴맛을 본 소련은 화력이 강화된 신예 전차의 개발에 들어갔다

 

비록 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가 충격적이기는 했으나 소련은 1953년부터 이미 신예 전차의 개발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지금과 달리 수많은 무기가 경쟁적으로 개발되던 당시만 해도 약 10년 정도를 주력 전차의 전성기로 보았기에 이런 진행 상황은 당연했다. 사실 현대 무기사를 살펴보면 무기의 개발 및 배치에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대개 어떤 새로운 모델이 본격 제식화되는 시점부터 후속작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소련 기술진들은 M47, M48 등 서방측 주력 전차에 대해 여러 경로로 정보를 취득해 분석한 결과, T-55에 장착한 100mm 구경의 D-10 주포로는 격파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화력 강화가 당장 해결해야 할 선결 과제로 떠올랐다. 물론 방어력과 기동력도 중요하지만 막상 적 전차를 격파할 능력이 부족하면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200리터 드럼 2개를 후방에 탑재한 T-62. 피격 위험에도 불구하고 작전 거리를 증대시키기 위해 소련(러시아) 전차들이 흔히 쓰던 방법이다.

 

 

아직은 제2차 대전 당시의 트렌드가 많이 남아 있던 때라, 다양한 대전차 수단이 개발되긴 했지만 전차는 전차로 격파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특히 서유럽과 대치하고 있는 동부 유럽의 거대한 평원을 고려한다면 소련은 대규모 기갑전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어야 했다. 예전의 기갑전은 가까운 거리에서 뒤섞여 난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기동력이나 방어력보다 일발로 상대를 격파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이 중시되었다.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자 기존의 T-55를 기반으로 성능을 개량하는 방식과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차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동시에 연구가 진행되었다. 전자는 T-54를 제작한 UVZ이 주도한 제140계획(Object 140)이었고, 후자는 T-54를 개량하여 T-55를 만들어낸 바 있던 KMDB의 제430계획(Object 430)이었다. 1957년 프로토타입을 놓고 이루어진 평가에서 보다 혁신적인 기술을 접목하기로 한 제430계획이 낙점을 받았다.

 

 

 

제430계획은 이후 T-64가 된다. 하지만 첨단 기술을 많이 적용하다 보니 정작 개발이 늦어졌는데 이는 T-62가 주력 전차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cc) Сергій Попсуєвич at Wikimedia.org>

 

 

신기술의 개발이 늦어지자 다급해진 군부가 임시변통의 전차를 탄생시킨다

 

이렇게 채택된 제430계획은 훗날 소련 제3세대 전차의 효시인 T-64가 된다. 하지만 주포 발사용 대전차 미사일이나 복합장갑 등은 미처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대를 너무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최신 기술을 일거에 적용하려다 보니 정작 개발에 난항을 겪은 것이다. 이처럼 예상과 달리 제430계획의 진행에 문제가 발생하자 다급해진 소련 군부는 경쟁에서 탈락한 제140계획을 기반으로 임시변통할 전차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제165계획(Object 165)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프로젝트의 핵심은 개량형 T-55에 신형 D-54 주포를 장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D-54는 기존의 T-55에 장착된 D-10 주포보다 포구 속도는 증가했지만 서방측 전차를 격파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라 판단되었다. 바로 이때 개발된 T-12 대전차포가 개발자들의 눈에 들어왔다. 2A19라고도 불리는 T-12는 사거리와 관통력을 늘리기 위해 강선을 제거한 활강포였다.

 

 

 

100mm 구경의 활강포인 T-12 대전차포. 파괴력이 떨어지는 D-10 주포의 대안으로 활강포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출처: (cc) George Shuklin at Wikimedia.org>

 

 

활강포는 명중률이 떨어지지만 관통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날개안정분리철갑(APFSDS)탄을 사용하는 데 적합하다. 원래 총포가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강선이 없었으므로 활강포가 획기적인 신기술은 아니었지만, 전차의 장갑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방어력이 늘어나면서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이었다. 바로 그때 영국의 로열 오드넌스(Royal Ordnance)가 화력이 대폭 강화된 105mm 구경의 L7 전차포를 만들었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서방측 포에 비해 부족한 파괴력과 관통력을 만회하기 위해 주로 구경을 늘리는 방법을 써왔던 소련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야심만만하게 도입하려던 T-12가 아무리 활강포라 해도 100mm 구경이어서 파괴력에서 뒤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소련은 D-54의 머즐 브레이크(Muzzle Brake, 포구 제퇴기)를 제거하고 강선을 없앤 115mm 구경의 활강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바로 2A20라고도 불리는 U-5TS 전차포였다.

 

 

 

러시아 베르흐냐야피시마 전차 박물관에 전시 중인 T-62. 115mm 구경의 U-5TS 전차포를 장착하여 최초로 활강포와 날개안정분리철갑(APFSDS)탄을 쓴 전차가 되었다.

<출처: (cc) Владимир Саппинен at Wikimedia.org>

 

 

T-62는 대타로 잠시 쓰일 거란 예상을 깨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U-5TS는 명중률이 기존의 D-10에 비해 낮았으나 포구 속도가 빨라 관통력이 1.5배 정도 되었고 사거리도 2배에 달했다. 1960년, 이 새로운 활강포를 주포로 채택한 신예 전차 개발 프로젝트가 제166계획(Object 166)으로 명칭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차체나 포탑의 대대적인 개량 없이 주포를 바꾸는 방식으로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개발을 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새로운 주포의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신안정 장치 등의 개량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난제였으나 하루 빨리 신예 전차의 배치를 요구하는 군부의 조급증이 너무 커서 개발진의 어려움이 많았다. 군부는 제430계획이 완료되기 전의 일시적인 전력 격차를 메울 요량이다 보니 이런 문제는 일단 무시하려 들었다. 그만큼 M60, 레오파르트(Leopard)1 등 서방측의 신형 전차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이다.

 

 

 

T-62의 측면. UVZ의 전작인 T-54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서방측이 소련의 전차에 느끼고 있던 공포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115mm 구경의 활강포를 장착한 신형 전차의 개발 정보는 경악으로 다가왔다. 겉으로는 내가 더 강하다고 선전하면서도 정작 상대를 두려워했던 냉전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개발이 완료된 제166계획은 T-62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1961년부터 일선에 본격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T-64의 배치가 이루어질 때까지만 잠시 임무를 대행시키려 한 계획과 달리 T-62는 이후 22,000대 이상 제작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T-64의 개발이 계속 지지부진하기도 했지만 일선에서의 평가가 예상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곧바로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던 T-62는 최초로 활강포와 날개안정분리철갑(APFSDS)탄을 장착한 전차로 무기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면서 이후 여러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연막을 펼치며 돌격하는 T-62.

 

 

출중하고 획기적이라 보기엔 부족함이 많은 전차였다

이후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성능을 향상시켰지만 사실 일선에서의 호평은 대단히 만족스럽다기보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쓸 만하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많은 자료에서 T-62를 소련 최초의 제2세대 전차로 언급하지만 대구경 활강포로 화력을 증강시키고 광폭 궤도로 주행성을 향상시킨 점을 제외한다면, T-55와 비교하여 획기적인 변화를 이룬 후속작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구시대의 목측식(目測式) 조준경은 강화된 공격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2차 대전의 경험 때문에 소련은 전차전이 주로 시야 범위 내에서 벌어진다고 여겨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초창기 활강포의 명중률도 신통치 않아서 사거리가 늘어났음에도 원거리 교전은 어렵다고 보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매번 포신 각도를 전환해 주어야 하는 자동 탄피 배출 장치도 문제였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당시 격파되어 불을 뿜고 있는 시리아군 소속 T-62 <출처: (cc) Avneref at Wikimedia.org>

 

 

1969년 발발한 중소국경 분쟁에 처음 투입되었지만 제한적인 교전을 펼쳐 그다지 의미 있는 결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고질적인 원거리 교전능력 부족 문제는 1973년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당시에 여실히 드러났다. 이처럼 최초 실전에서의 활약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결국 1983년 레이저 거리 측정기와 탄도 계산기 등을 도입한 개량형 T-62M이 등장했지만 그때는 후속작 T-72가 주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타로 등장해 주력이 된 T-62는 현재도 활용되는 베스트셀러 전차이다

 

현재 T-62는 북한군의 주력 전차이므로 우리 안보와도 상당히 관련이 많다. 북한은 1970년대에 약 500대를 직도입하고 이후 ‘천마호’라는 이름으로 데드카피하여 1,200여 대 정도를 생산했다. 또한 공식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2010년대 이후 공개 행사에 등장한 폭풍호나 선군호도 T-62의 개량형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소련과 라이선스 생산한 체코슬로바키아가 단종했으므로 북한은 현재 지구상에서 유일한 T-62 생산국이라 할 수 있다.

 

 

 

퍼레이드에 등장한 천마호. T-62의 데드카피형으로 현재 북한군의 주력 전차다. <출처: 유용원의 군사세계>

 

 

T-62는 임시 대타의 성격이 다분했기에 탄생 당시에는 제대로 주목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T-64의 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질적, 양적으로 소련군의 주력이 되었고, 동구권과 친소국가에도 대량 공급되면서 무기사의 주역으로 운명이 바뀌었다. 비록 실전에서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현재도 상당수 중소국가에서 주력 전차로 활약하고 있을 만큼 장수한 무기이기도 하다.

 

물론 지속적인 개량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기본적인 성능을 갖추지 못하고서 이토록 오랫동안 현역으로 뛸 수 없음은 불문가지다. 무기사에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만큼 수많은 전차가 등장했지만 정작 이 정도로 오랜 세월 일선에서 활약한 전차도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T-62는 나름대로 제 역할을 다한 베스트셀러 전차라고 할 수 있다.

 

 

제원


중량 37톤 / 전장 9.34m / 전폭 3.30m / 전고 2.40m / 항속거리 450km / 최대속도 50km/h/ 승무원 4명 / U-5TS 115mm 활강포 1문, 12.7mm DShk 기관총 1정, 7.62mm RKT 기관총 1정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출처    http://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4/06/20160406007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