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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야생마 P-51 머스탱

有美조아 2015. 12. 21. 19:56

 

352 전투비행단 소속으로 활약한 P-51D. 캐노피 부근에 그려진 격추 기록이 인상적이다.

 

 

1943년 1월,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없애기 위해 독일 본토 요지와 공업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작전을 일원화하여 주간에는 미국이, 야간에는 영국이 전담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위해 B-17, B-24, 아브로 랭커스터 같은 대형 폭격기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이른바 전쟁 종결을 목적으로 한 전략폭격이었다.


 

그런데 자체 방어 능력이 뛰어나 적진에서의 단독 작전도 문제없다고 보았던 중(重)폭격기들이 독일 요격기에 의해 격추되어 나갔다. 둔중한 폭격기와 날렵한 요격기의 공대공 대결은 어쩌면 일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주간에 작전을 펼치는 미군의 피해는 컸다. 호위 전투기로 하여금 폭격기를 보호하도록 조치하였으나 독일의 대응도 빨랐다. 폭격기와 호위기의 항속거리 차이를 적극 이용하였던 것이다

 

 

 

미군 최초로 흑인 공군 조종사를 양성한 터스키기 훈련 비행단 소속의 P-51C. <출처 (cc) RadioFan at Wikimedia.org>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으로 유럽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기 이전에 연합군 전투기들은 영국에서 출격하였는데, 항속거리가 짧아 독일 국경 부근에 이르러서는 되돌아가야 했다. 독일은 이처럼 연합군 비행대에서 호위기들이 회귀하는 시점부터 폭격기 요격 작전을 펼쳤다. P-38처럼 일부 항속거리가 긴 전투기들도 있었지만 독일의 Bf 109나 Fw 190의 상대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1943년 겨울, 자신만만하게 미군 폭격기 편대의 요격에 나선 독일 전투기들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일군의 호위기 편대를 보았다. 독일 본토 깊숙한 곳까지 예상치도 못한 미군 전투기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곧바로 전투기 간 공중전이 개시되었고 독일은 이들이 대단한 상대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예기치 못한 출현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든 주인공은 P-51 머스탱(Mustang)이었다. 그렇게 독일에게 재앙이 시작되었다.

 

 

 

급강하 브레이크가 인상적인 A-36 아파치. 최초 P-51의 성능이 미흡하여 미국도 영국처럼 대지공격기로 운용하였다.

 

 

이미 있었던 전투기

 

사실 독일은 P-51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전투기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를 부랴부랴 호위기로 채택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은 폭격기 호위 작전에 투입한 P-51B 형의 이전 모델을 1942년부터 A-36 아파치(Apache)공격기로 이미 사용 중이었다. 처음에는 전투기로 도입하였지만 공대공 능력이 뒤진다고 판단하여 개조하여 공격기로 전용한 것이었다.


 

적어도 초기 모델의 성능만 놓고 본다면 미국의 판단이 틀렸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조금만 가다듬으면 엄청난 가격의 보석으로 팔릴 수 있는 원석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제2차 대전에 참전하였지만 경쟁국과 비교하면 전투기의 성능이 미흡하였다. 당연히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지만 정작 그들은 역사상 최고의 프로펠러 전투기가 될 후보작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10월 잉글우드 공장 상공에서 영국 공군 위장 바탕에 미국 국적 표시를 하고 실험 비행 중인 머스탱 Mk. I.

 

 

이후 항공전사에 커다란 한 획을 긋게 되는 엄청난 명마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은 어쩌면 개발 당시부터 P-51이 미군의 관심 밖에 있었던 기종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미 공군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는 P-51은 미국의 노스아메리칸(North American) 사에서 개발하였지만 정작 영국을 위해 탄생하였고, 영국에 의해서 걸작으로 개조되었다. 하다못해 머스탱이라는 이름도 영국이 부여한 것이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후 주변을 향해 대외 팽창 의지를 노골화하자 영국도 전쟁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객관적으로 전력 차이가 심한 부분이 공군, 그 중에서도 전투기가 부족하였던 영국은 당장 수량부터 메워야 했다. 이제 막 스핏화이어(Spitfire)가 양산에 들어갔지만 지금 전쟁이 벌어진다면 상당히 우려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외에서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하였다.

 

 

 

(좌)양산 직후의 초창기 스핏화이어. 당대 최고의 전투기였지만 독일과 전쟁이 예견되다 보니 수량이 절대 부족하였다.
(우)노즈 아트가 인상적인 P-40. 동 시대 각국 주력 전투기에 비해 성능이 뒤졌으나 급했던 영국은 이를 구매하고자 하였다.

 

 

위기가 만든 기회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후 주변을 향해 대외 팽창 의지를 노골화하자 영국도 전쟁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객관적으로 전력 차이가 심한 부분이 공군, 그 중에서도 전투기가 부족하였던 영국은 당장 수량부터 메워야 했다. 이제 막 스핏화이어(Spitfire)가 양산에 들어갔지만 지금 전쟁이 벌어진다면 상당히 우려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외에서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국제 정세상 영국이 전투기를 살 수 있던 곳은 미국 밖에 없었다. 일단 전투기 같은 고성능 무기를 제작하는 나라도 적었지만 동맹국 프랑스는 제 코가 석자였고 독일, 일본, 소련은 당연히 제외 대상이었다. 아직 전쟁 전이어서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영국에 호의적이었고 상업적 거래로 무기를 판매하는데도 크게 제한을 두지 않았다.


 

구매사절단이 미국에 오자 당연히 많은 군수 업체들이 로비에 들어갔고 노스아메리칸도 그런 회사 중 하나였다. 그들은 이제 막 개발을 끝낸 B-25 중형(中型) 폭격기의 구매를 제안하였지만 한마디로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었다. 당장 전투기가 급했던 사절단은 미흡하지만 미국제 중에서 그나마 쓸 만하다고 생각한 P-40 워호크(Warhawk)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제는 P-40 생산자인 커티스(Curtiss)가 미군 납품 물량을 대기에도 벅차서 영국의 주문량을 수용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절단은 마침 노스아메리칸 사장 제임스 킨들버거(James H. Kindelberger)를 만난 김에 노스아메리칸에서 P-40을 하청 생산하여 영국에 공급하여 줄 수 있겠냐고 문의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P-40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의 딱한 사정을 정확히 꿰뚫어 본 킨들버거는 오히려 역으로 제안을 하였다.

 

 

 

노스아메리칸의 NA-73X 실험기. 단순하면서도 고속 비행에 적합한 날렵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위해 탄생하다

 

넉 달의 시간만 준다면 P-40보다 뛰어난 전투기를 제작하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노스아메리칸은 오래 전에 엔지니어 에드거 슈무드(Edgar Schmued)의 주도로 설계를 완성하였지만 미군이 관심을 보이지 않아 개발을 보류한 NA-73으로 명명한 신예기 프로젝트가 있었다. NA-73은 공기 저항 감소에 유리하도록 주익의 가장 두꺼운 부위를 중앙에 위치한 라미나 윙(Laminar wing) 구조를 채택하였다.


 

킨들버거는 이 기술이 속도와 항속거리를 늘릴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에 일견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제안을 하였던 것이었다. 이에 영국은 넉 달 안에 요구된 성능을 만족하는 전투기를 개발한다면 300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하였다. 1940년 10월 26일 개발 117일 만에 시제기가 완성되었고 반신반의하였던 영국은 NA-73가 요구하였던 성능 조건을 충족하자 머스탱 Mk. I이라 명명하고 원 계약보다 많은 320기를 주문하였다.

 

 

 

새롭게 머스탱에게 이식 된 롤스로이스 멀린 61엔진.

그저 그런 전투기로 끝날 가능성이 컸던 머스탱이 역사상 최고의 프로펠러 전투기가 되도록 만든 공신이다.

<출처 (cc) JAW at English Wikipedia>

 

 

1942년 1월부터 영국군에 본격적으로 공급되었지만 정작 이를 사용한 일선의 반응은 아쉽다는 의견이 많았다. 고도 4,000m 이하에서는 스핏화이어나 Bf 109 못지않으나 그 이상 올라가면 비행 성능이 급속히 저하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공대공전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지상 공격기로 임무가 전환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전쟁에 참전한 미국도 같은 어려움을 느껴 A-36이라는 제식부호를 붙여 공격기로 운용하였다.


 

4월 영국 공군의 시험 비행사 롤란드 하커(Ronald Harker)는 고고도에서 유별날 정도로 성능이 급전직하하는 이유가 앨리슨(Allison) V-1710 엔진 때문이라 생각하여 스핏화이어가 사용하는 롤스로이스 멀린(Rolls-Royce Merlin) 61엔진을 장착하여 시험하자는 의견을 당국에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심장을 바꾼 5기의 머스탱이 시험 비행을 실시하였는데 결과는 조금만 성능이 향상되어도 만족하겠다던 연구자들의 작은 희망을 완전히 깨버렸다.

 

 

 

(좌)새롭게 심장을 이식 받은 P-51B. 영국에서는 머스탱 Mk. II로 명명되었다.
(우)버블 캐노피로 쉽게 구별이 가능한 P-51D

 

 

최강의 전투기

 

역사상 최강의 프로펠러 전투기가 탄생한 것이었다. 시속 700km의 속도는 당시 최고였고 고고도, 저고도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날뛰어 다녔다. 강력한 엔진을 만나게 될 경우 성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던 라미나 윙 구조의 머스탱에게 멀린 엔진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 영국은 이를 머스탱 Mk. II로 명명하고 기존 도입 물량을 개조하는 것 외에도 1,000기를 추가 주문하였다. 예상외의 결과에 놀란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P-51을 다시 주목하였고 라이선스 생산한 멀린 61엔진을 장착하여 성능이 대폭 강화 된 P-51B를 일선에 공급하였다. 그런데 초기형의 성능에 실망하여 A-36 공격기로 사용하였던 기억 때문인지, 일선에서는 여전히 대지공격기로 운용하였다. 그러던 중 갈수록 폭격 비행대의 희생이 커지자 장거리 항속 운항이 가능한 점 때문에 P-47을 대신하여 호위기 역할을 담당하도록 낙점되었다.


 

P-51은 조종석 후미 공간에 추가로 연료를 탑재하고 외부에 보조 연료탱크를 달면 최대 2,700km를 비행할 수 있었다. 폭격기들을 보호하며 독일로 날아간 머스탱들은 독일 요격기들을 하나하나 차단하여 나갔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제2차 대전 중 9,000기 가량의 적기를 격파했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는 당시 활약한 모든 연합군 전투기 중 최대의 전과다.

 

 

 

1944년 편대 비행 중인 375전투 비행대 소속의 P-51D

 

 

우리와도 깊은 인연

 

독일 전투기들의 우선 목표가 폭격기였고 전쟁 말기라서 조종사들의 질이 저하되었기에 P-51과 제대로 교전을 벌이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숫자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쟁 말기의 P-51은 그야말로 경쟁자가 없던 하늘의 제왕이었다. 하지만 이러했던 P-51의 전성기도 불과 3년도 되지 않아 막을 내려야 했다. 전쟁 말기 등장한 Me 262를 시작으로 제트전투기가 하늘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출격 중인 한국 공군의 F-51D 편대

 

 

제2차 대전 종전 후인 1948년 미국은 전투기에 사용하던 제식부호 P(ursuit)를 F(ighter)로 바꾸면서 머스탱도 F-51로 바뀌었지만 더 이상 전투기로 활약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최초로 제트전투기 간에 공중전이 벌어진 한국전쟁은 F-51에게 또 다른 무대가 되었다. 산악지역이 많은 한반도에서 근접전이 벌어질 때 저속으로 근접하여 대지 공격을 가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공군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북한의 남침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일본 이다즈케(板付) 기지로 건너 간 조종사들이 훈련 후 10기의 F-51 전투기를 미군으로부터 인수하여 온 것이 우리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비록 공대공 전투는 펼치지 못하였지만 1952년 1월 15일에 있었던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처럼 대지 공격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한국 공군에게는 최초이자 가장 실전 경험이 많았던 의미가 가장 큰 전투기라 할 수 있다.


 

제원

 

탄약 .45 ACP 또는 9×19mm 파라블럼 / 작동방식 블로우백, 오픈볼트 / 전장 757mm / 중량 3.63kg / 발사속도 분당 450발 / 유효사거리 100m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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